사라진 브랜드,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이 브랜드,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청담동 골목을 걷다 보면, 마치 유럽의 오래된 약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대리석 벽과 손글씨 간판, 고서에서나 봤을 법한 유리병들이 줄지어 놓인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은은한 향과 함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곳은 바로 ‘오피신 유니버셀 불리(L’Officine Universelle Buly)’, 줄여서 ‘불리’라 불리는 브랜드다.

처음엔 나도 그랬다. "이거 새로 만든 고급 향수 브랜드야?"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브랜드의 시작은 무려 1803년 파리였다. 어쩌다 지금, 이 낯선 골목에서 불리를 마주하게 된 걸까? 더 놀라운 건, 한때는 아는 사람만 알고있는, 완전히 잊혔던 이름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라졌던 브랜드는 어떻게 다시 살아났을까?


불리 브랜드의 부활은 단순한 마케팅이 아닌, 하나의 문화적 복원 작업에 가까웠다. 불리의 이야기 속에는 브랜딩의 본질, 감성의 힘,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되살리는 법’이 담겨 있다.


디자이너로서 이 브랜드를 마주했을 때, 단순히 오래된 것을 멋지게 복각한 수준이 아니라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리브랜딩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불리는 ‘잊혀진 철학’을 감각적으로 복원해낸 브랜드였다. 생산 방식, 용기 디자인, 공간 연출, 타이포그래피까지 모든 요소가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연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건, 그들이 과거를 소비하지 않고 계승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빈티지해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정말 그 시절이 품고 있던 정서를 지금의 언어로 다시 쓰고 있다는 사실. 디자인이 단순한 꾸밈이 아닌, 시간을 다시 설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이 브랜드를 통해 새삼 실감하게 됐다. 오늘 다루는 불리라는 브랜드는 디자이너로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지를 다시 질문하게 했다. 단지 멋진 결과물을 넘어서, 한 시대의 감각과 이야기를 현재에 숨 쉬게 만드는 작업. 그것이 진짜 리브랜딩이고, 내가 언젠가 해보고 싶은 방식이기에 더욱이 많은 역사와 브랜드의 스토리를 찾아보며 글을 써보게 되었다.


1803년 불리의 모습


"한때는 파리에서 가장 잘나가던 약국이었다" – 불리는 왜 사라졌을까?


1803년, 파리의 중심에서 한 약국이 문을 열었다. 이름은 ‘오피신 유니버셀 불리’. 장 뱅상 불리라는 인물이 운영하던 이곳은 단순한 약국이 아니었다. 그는 식초와 장미수를 혼합한 ‘식초 화장수’로 큰 인기를 얻었고, 물 베이스의 향수라는 획기적인 제품으로 귀족들과 부르주아 계층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드물게 피부를 자극하지 않는 자연 원료 기반의 화장품을 선보인 점에서도 혁신적이었다. 불리는 곧 파리에서 가장 세련된 미용 상점으로 이름을 알렸고, ‘아름다움은 과학의 영역’이라는 그의 철학은 시대를 앞섰다.


불리 브랜드의 당시 200년전 패키지디자인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시대는 변했고,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불리는 점점 잊혀져 갔다. 대량생산 체제가 들어서고, 대형 향수 브랜드와 제약회사가 시장을 장악하면서, 장인정신을 고수하던 불리 같은 브랜드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특히 향수 시장의 중심이 파리에서 남프랑스의 그라스로 이동하면서, ‘도심 속 공방’이라는 콘셉트는 낡은 유산처럼 여겨졌다. 무엇보다 불리의 이름을 지켜줄 후계자가 없었다는 점은 브랜드의 운명을 더욱 덧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불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당시에는 브랜드 자산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기에, 고유의 철학과 가치가 사라지는 일도 특별할 것 없이 흔했다. 지금 와서 보면, 단순히 하나의 상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와 미학이 사라진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공백은 오랫동안 누구도 대신 채우지 못했다.



람단투하미와 그의 아내, 불리를 살려낸 브랜드 크리에이터이다.


2. 브랜드를 발굴한 한 수집가의 집착 – 불리를 다시 만든 사람들


한때 파리를 대표하던 뷰티숍이 있었다. 식초 화장수로 이름을 알리고, 물 베이스 향수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품으로 파리지앵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브랜드, ‘오피신 유니버셀 불리(Officine Universelle Buly)’. 하지만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이 브랜드는 잊혀졌고, 그렇게 한 세기가 넘도록 역사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 긴 침묵을 깬 건 2014년, 프랑스의 아트 디렉터 람단 투하미(Ramdane Touhami)와 뷰티 연구자이자 그의 아내 빅투아르 드 타야크(Victoire de Taillac)였다. 두 사람은 단순히 오래된 브랜드 이름을 되살린 것이 아니라, 19세기 프랑스의 뷰티 미학과 약학적 전통을 현대에 복원하는 프로젝트에 가까운 작업을 시작했다.

람단은 마치 고고학자처럼,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장 뱅상 불리의 기록을 뒤지며 조향 레시피, 제품 철학, 포장 양식까지 철저히 고증했다. 아내 빅투아르는 제품의 감도와 경험을 재설계해 오늘날 감성에 맞춘 브랜드로 세공했다. 그 결과, 불리는 ‘과거를 살린 브랜드’가 아니라 ‘시간을 다시 만든 브랜드’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불리의 독특한 세계관은 곧 글로벌 시장의 이목을 끌었고, 2017년부터는 LVMH의 벤처 부문이 소수 지분 투자를 통해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2021년, LVMH가 불리 1803을 공식 인수하며 이 브랜드는 루이비통, 디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LVMH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는 “불리는 비교할 수 없는 장인 정신과 유산, 탁월한 매장 경험을 갖춘 브랜드”라고 평가하며, 이들이 앞으로도 그룹 내에서 독립적인 감성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이처럼 불리의 부활은 단순한 복각이 아니다.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그러나 본질은 흐리지 않으며, 과거의 철학을 오늘에 이어 붙인 브랜드 리빌딩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잊혀진 이름을 다시 빛나게 만들고자 했던 한 집착 어린 시선과, 감각적인 손길이 있었다.



3. 지금, 불리는 어떻게 사랑받고 있을까?


불리를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낀다. 이 브랜드는 ‘향수’를 파는 게 아니다. 시간, 감성, 그리고 디테일을 건넨다.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바닥 타일의 패턴부터 진열장 손잡이까지 모든 것이 19세기 유럽을 체험하게 만든다. 전국 매장의 인테리어가 각각 다른 테마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은, 브랜드가 얼마나 ‘공간 경험’에 집착하는지를 보여준다. 단순히 예쁜 매장을 넘어, 브랜드 세계관 안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장치다.

불리의 대표 상품은 워터 베이스 향수 ‘오 트리쁠(Eau Triple)’이다.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아 피부 자극이 적고, 향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점에서 민감성 소비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이 향수는 고급 향유를 사용해 제작되며, ‘리켄 데코스’ 같은 시그니처 라인은 불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추천된다.


필자가 직접 만난 인천 롯데백화점의 불리 매장 매

하지만 불리의 매력은 단순한 제품력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화 경험, 즉 고객 맞춤형 서비스에서 오는 정서적 만족감이 핵심이다. 립밤이나 핸드크림에 이니셜을 새겨주는 각인 서비스, 고객이 요청한 문구를 매장 직원이 직접 캘리그래피로 손글씨로 써주는 경험은, 이 브랜드가 얼마나 고객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드러낸다. 심지어 이 서비스를 위해 직원들은 필기체 교육까지 이수한다고 하니, 단순한 퍼포먼스를 넘어선 진심이 느껴진다. 다만 필자가 방문한 매장은 스티커로 대체하고있었다.


또한 불리는 제품의 성분과 기능에서도 독창적인 철학을 유지한다. 향수는 알코올을 쓰지않고, 핸드크림에는 시어버터를 10%까지 넣어 업계 평균의 두세 배를 훌쩍 넘긴다. 향수에 쓰는 것과 동일한 향유를 비누에 사용하는 방식도 인상 깊다. 브랜드는 ‘자연 유래’라는 말을 반복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브랜드보다 철저하게 자연의 힘을 빌리고, 그 가치를 세련되게 전달하고 있다. 불리는 결국 '니치'를 정확히 겨냥한다. 흔한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까다로운 취향과 예민한 감각, 그리고 뭔가 특별한 것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브랜드. 그래서일까, 이 브랜드는 말보다 물건 자체와 경험 전체로 이야기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불리는, 단순한 뷰티 브랜드를 넘어 하나의 예술적 경험에 가깝다.








4. 사라진 브랜드는 죽은 걸까? – 과거를 부활시키는 새로운 방식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브랜드는 트렌드를 놓치면 잊히고, 세월 속에 묻히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하지만 불리는 그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었다. 중요한 건, 그 브랜드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브랜드가 품고 있던 철학과 감성이 지금의 시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였다.



불리는 단순히 옛 것을 복각한 브랜드가 아니다. 오래된 이름 뒤에 숨은 문화적 깊이를 해석해 오늘의 언어로 풀어냈기에 특별하다. 만약 누군가가 "오래된 건 다시 써먹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불리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오늘날 수많은 브랜드가 ‘뉴트로’ ‘리브랜딩’을 말하지만, 그 대부분은 외형만 다를 뿐 뿌리 없는 새로움에 머물곤 한다. 반면 불리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어떤 세계를 보여줄 것인가’에 집중한 브랜드다. 감성, 공간, 제품, 심지어 종이 하나에도 브랜드의 세계관이 흐른다. 그리하여 소비자는 단순히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을 소유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불리의 부활은 우리에게 묻는다. 브랜드가 사라진다는 건 정말 죽는 걸까? 아니면, 그것을 다시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브랜드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불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철학, 태도 같은 것들을 말이다. 브랜드의 헤리티지나 스토리를 쓸 때, 그것이 반드시 과거에 실존했던 사실일 필요는 없지만, 설득력 있게 쌓여야 한다는 점에서 디자이너에게는 일종의 창조이자 고고학 작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브랜드는 결국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과거와 미래를 한 줄로 이어 답하는 일이라고. 그래서 브랜드의 가치, 매니페스토, 추구사항, 에센스 등을 다시 설정할 때, 내가 참고할 수 있는 사례는 언제나 깊이 있는 태도를 가진 브랜드들이다.


예컨대 바샤커피처럼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그럴싸한 세계관으로 포장해 설득해내는 방식도 한 가지 전략일 수 있다. 그 접근이 가진 흥미와 유연함도 나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방식, 불리처럼 진짜로 존재했던 역사 속 이름을 꺼내어, 그 철학과 시각적 감각, 당시의 목소리까지 계승하며 ‘지금’에 연결시키는 브랜드 작업은 또 다른 감동을 준다. 그건 단지 리브랜딩이 아니라, 시간의 연결에 가깝다. 디자이너로서 나는, 언젠가는 그런 방식으로 브랜드를 구성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다. 단지 보여지는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공기, 질감, 기억까지 설계하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브랜드는 결국 말보다 행동이고, 이념보다 감각이다. 언젠가,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따뜻한 무언가를 지금 이 순간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 불리를 보며 그 가능성을 엿봤고, 언젠가는 그 가능성을 내 손으로 실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